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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수의 <무한을 위한 표지>전에 부쳐

: 시각 기호에서 예술적 언어로

 

 

그의 지하실 작업 공간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공간은 단순히 한 작가의 작업실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 이상의 분위기로 가득 찬 곳이었다. 마치 비밀 아지트 같았으며, 흰 벽면은 알 수 없는 기호들, 하지만 직관으로도 그 나름의 내적 논리를 겸비한 것처럼 보이는 기호로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복잡성과 단순성의 정도를 감안하고, 여러 변주와 비약의 단계를 추적해 가다 보면, 이내 눈과 마음은 자연스레 그 기호들의 시작과 기호들을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만드는 원리가 무엇인지 묻게 된다. 유클리드적 체계에서 시작된 점과 선은 선형적 논리에 갇혀 조합, 변형되다가, 또 어느 지점에서 직선은 비선형의 곡선으로 변형됐고, 화살표나 지그재그 패턴 등이 나타나면서 기호의 조합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기도 했다. 그 공간의 중심엔 최근 진행 중인 회화 작품이 몇 개 놓여 있었는데, 누가 보더라도 대번에 그 작품들이 그가 구축한 기호 체계의 시공간적 구현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을 그 공간, 그 기호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건 자명해 보였다. 마침내 전체 공간은 한 사람의 미학적, 철학적 사고가 응고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새로운 사고, 낯선 감각과 언어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감성의 요동, 가벼운 흥분, 그리고 지적 호기심을 불러 온다.

그의 작업 공간은 지금 이 비평을 이렇게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충분히 주고 있었다. 그는 그 기호의 세계와 그 나름의 논리적 체계 안에 있었고, 기호를 통해 사유하고, 심지어 철학하고 있었다. 기호 탐구의 결과물은 실제로 <The Book of Wisdom 1996-2014>(2014)이란 제목으로 출간도 됐으니, 그의 시각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그의 책을 들춰보는 것도 좋겠다. 그의 책은 마치 미학적 버전의 비트겐슈타인 같았고, 그의 초기 <논리 철학 논고>에 비견되어 ‘기호 미학 논고’라 불러도 좋을 것이었다. 그의 언어는 무척이나 농밀하고 난해하지만 풍부한 은유와 암시, 그리고 그의 말대로 지혜의 아포리즘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스스로 밝힌 것처럼 그 책은 시각 기호로 가시화된, “아름다움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의식의 흐름과 그것을 형상화하는 과정”, 소위 ‘중용’의 미덕에 스스로 납득하고 타인에게 설득하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랜 사색과 통찰을 통해 성안해 낸 일종의 미학 체계에 가까웠다. 거기엔, 자신이 만든 기호 체계의 해설뿐만 아니라, 기호의 수학적 기반 체계로서 유클리드적 기하학과 비유클리드적 기하학, 선형, 비선형, 프랙탈 논리가 담겨 있었으며, 비약과 확장을 거듭하면서 형태 심리학, 정신분석, 윤리, 역사, 종교적 통찰에 이르기도 했다. 그 기호 각각은 작가 자신의 미학적 체계 내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의미뿐만 아니라 보다 일반적 의미에 접목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풍부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호는 그 자체로 주체, 진리, 절대자에 관한 직관과 이해를 낳는 도구가 되었고, 삶의 특수한 상황, 조건, 문제들,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에 적용될 수는 사례들로도 확장된다. 세미오시스에서 다소 자의적 비약이 일어날 땐 신비주의적 색채를 띠기도 하지만, 존재론, 미학, 형이상학이 가장 일반적 층위에서 이 모든 내용과 측면을 아우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책은 가히 ‘기호의 미적 형이상학’이라 불러도 좋은 것이었다. 책을 다 읽었을 때,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신은 태초에 기호를 만들었으니, 그것으로 그의 지혜를 얻으라.” 그는 그렇게 기호를 일종의 구도의 도구로 삼고 있었고, 이제 그가 얻은 깨달음, 존재와 삶의 지혜를 예술이라는 형태로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성수는 기존에 내러티브나 장르가 분명한 회화 작업을 해왔으나, 금번 전시에서는 근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발전시킨 자신의 기호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미 2015년 회화 작업을 통해 자신의 기호를 선보인 바 있지만, 사실상 이번 전시가 더 온전하다. 그의 기호 체계는 일정 수준의 전개 과정에 이를 때, 하나의 언어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언어가 가져야할 최소한의 구조, 계열체와 결합체, 그리고 비록 우리에겐 낯설지라도 결합의 규칙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의 언어의 의미작용은 쉽게 해독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기호와 언어가 구축된 과정에서 그 각각의 요소, 그것들이 결합하는 방식, 그리고 그 결합의 방식이 줄 수 있는 의미작용은 어느 정도 보편적 직관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에게 형태와 패턴, 그것의 시공간적 배열을 해독할 수 있는 원형적archetypal 코드가 존재하는 한 그의 언어는 어떤 식으로건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언어로 기존의 기호 형식(예컨대, 재현, 은유, 상징과 같은)을 번역할 수 있게도 되었고, 또 자신의 언어에 특수하거나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고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가 자신의 언어를 세상에 내놓으려고 맘먹은 것은 그의 사적 언어가 예술의 수단이 되거나, 이미 그 자체로 예술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이번 작품은 그 스스로 창안해 낸 미적 형이상학 체계에 시공간적 구체성과 매체적 물질성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기호 연구를 그의 작품과 뗄 수 없으니 그의 작품은 그의 기호 체계에서 최초로 하나의 점(点)이 출현했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어쨌건, 그 과정은 추상적 체계가 구체적 시공간 속에 현실화하며 구현되는 과정이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기호에 예술의 옷을 입혔고, 이렇게 해서 그는 철학자나 미학자에서 예술가의 지위에 서게 된다. 그는 자신의 기호에 구체적 감각, 질, 형태, 공간, 연장을 부여했으며, 이제 기호는 무엇을 대리하는 것에서 벗어나 당당한 존재감을 갖게 되었다. 예술작품으로서 그 기호는 이제 추상적 실재가 아니라, 특수한 정서적 효과와 명제를 포함하는 구체적 실재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추상적 실재와 달리 그 스스로 다른 이가 자신을 어떻게 수용할지를 물리적으로, 객관적으로 제약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작가는 이제 기호가 언어적 수준에서 관객에게 수용될 때 그것이 가지게 될 구체적인 미적 효과와 의미를 더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작품은 기호를 어떻게 하나의 예술이 되게 할까라는 핵심적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예술이 된다.

철학자가 아닌 예술가로서 이성수는 이번 전시에서 두 가지를 크게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자신의 사적인 기호 체계를 어떻게 공적인 공간에서 공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이 이미 말한 것처럼, 사적 언어나 사적 기호란 있을 수 없다. ‘사적’이란 말과 공적인 성격을 갖는 ‘언어’나 ‘기호’는 처음부터 어울릴 수 없는 말이다. 사적이자 공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다만 사적으로 파악된 공적인 것은 있으며, 모든 일이 그러하다. 그의 기호 체계는 아무리 그 나름의 논리적인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에게만 통용되는 한 여전히 사적이고, 또한 이미 항상 작가 자신에게 전유된 것이라는 점에서 사적이다. 기호가 이렇게 작가와 온전히 이자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발한다면 처음부터 그의 기호는 예술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고, 굳이 물질성과 형상을 빌어 현실 속에 객관화되어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 기호는 항상 작가 자신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으로도 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기호는 예술이라는 형식을 빌려 공적 언어가 되려고 한다. 공적 언어는 언제든 관객에 의해 사적으로 향유될 수 있다. 무엇보다 기호는 예술가와의 이자 관계를 벗어나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인 사물로 이행해야 했다. 그의 기호가 순전한 기호 체계가 아니라, 감각적, 정서적, 지적 소통을 전제로 한 예술이 되기 위해선 그 기호에 구체적 실재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기호를 현실 속에 있게 만들어 주는 물질성의 마법을 부여했고, 동시에 각각의 기호에 형태적 성격character과 색채적 질, 그리고 그것들의 조합을 통해 구성이라는 형식을 입혔다. 이렇게 물질성, 성격, 질, 형식을 부여받은 기호는 이제 그 자체로 감각과 지각 대상이 되고, 관객의 미묘한 정서적 반응과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이 일련의 변환 과정을 일컬어 기호의 존재론적 변환ontological conversion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호가 예술이 되기 위한 필연적 수순이다.

만약 이런 존재론적 변환이 없고, 기호가 관객에게 순전히 무엇을 대리하는 것으로만 여겨진다면, 관객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한낱 기호를 보는 것이며, 그 기호의 의미를 알기 위해 작가가 만든 기호의 왕국의 신민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둘 뿐이다. 그 이자 관계는 마치 완전한 사랑에 빠져 있는 연인들처럼 제 3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기에 그들과 전혀 무관한 우리의 길을 가거나, 온전히 그의 왕국의 시민이 되어 살아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시대 어느 누구도 이런 독재 국가의 시민이 되길 원치 않을 것이다. 작가 역시 이를 잘 알테다. 그가 기호 형이상학자가 아니라 예술가인한 말이다. 결국 이번 전시는 기호를 이자 관계에서 풀어내, 공적인 영역에서 의미 작용할 수 있도록 해보는 실험적 무대라 할 수 있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그는 평면 회화의 형식을 빌릴 때에도 색채나 형태적 성격, 공간적 구성을 부여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기호에 주려고 했다. 두터운 물감층으로 저부조의 물질적 실재성을 부여하는 한편, 더 적극적으로 물질적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조각이나 설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구체적인 현실 공간에 존재하는 기호들은 구체적 실재가 가지는 힘을 부여받았고, 그 힘은 관객이 굳이 기호의 이면에 있는 코드와 작가를 참조하지 않고서도 기호가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효과를 낸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저 느낌의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코드를 따르면 된다. 이제 기호는 추상에서 구체적 현실로 변모했을 뿐만 아니라, 기호의 의미 작용은 이자 관계가 아니라 다자 관계에서 일어난다.

둘째 기호의 내포와 외연에 있어서 확장성의 문제다. 사실, <지혜의 책>에서 기호는 다소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에 있었기에 아직 현실과 일상이 갖는 역사, 문화적 세계에서 어떻게 의미작용을 할지, 예술의 사적, 제도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위치를 설정할지는 비결정적인 상태에 있었다. 이는 모든 추상적 실재가 본성적으로 갖는 숙명이다. 추상적 사물이나 그 사물들의 체계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현실에 어떤 필연적 관심도 갖지 않고, 개입도 하지 않는다. 기호와 언어는 그저 그렇게 있고, 그것을 구체적 의미로 수용하는 것은 생산자와 수용자 각자의 몫이다. 이 때문에 추상적 기호에서 구체적 예술이 될 때, 그의 작품은 제도적 맥락 속에서 회화, 조각, 설치, 장식, 공예 등 어느 것도 될 수 있으며, 또 풍부한 역사적, 문화적 함축을 갖는 상징이 될 수도 있고, 어떤 것을 재현할 수도 있을 것이며, 심리적 상태를 은유적으로 드러낼 수도, 매우 표현적인 것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저것을 다 떠나 우리가 아직 접하지 못한 독특한 존재 방식을 지닌 사물이 될 수도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전적으로 작가가 자신의 도구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나아가 그가 우리 시대에 예술의 존재 방식이나 위상, 기능, 수용의 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달린 문제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은 일견 미로의 초현실주의 그림이나 데이비드 스미스의 원시적 추상 조각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것으로 충분히 말할 수 없는 성격이 있다. 막상 그런 이미지들을 떠올린다고 해도, 작품은 그런 것들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로 달아난다. 어떤 이는 그것을 장식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상징적인 것, 또 어떤 이는 팝적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어떤 면에선 내면의 심적 상태, 정신분석, 자동기술, 욕망의 코드로 덧씌워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으로만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다시 말해 그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언캐니uncanny의 감각을 불러낸다. 개인의 사적이고 내적인 상태를 암시하지 않는 다른 의미의 언캐니란 무엇일까? 그런 감각은 차라리 가상적인 것the virtual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 말이 순전히 하나의 효과의 측면에서만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말이다. 그의 작품엔 그 기호의 조합이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을 수 있는 지점에서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는 지점까지 열려 있다는 점에서 의미의 과잉이 주는 알 수 없는 몰입감과 존재감이 있다. 심리적인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언캐니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그의 작품의 특별함 중 하나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 중에는 분명히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의미 작용을 하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긴 화살표 모양의 것은 롱기누스의 창을 연상케 하며, <화살에 맞은 세바스티안>은 기존 텍스트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것들은 어떤 점에서 기존의 형상과 텍스트를 자신의 기호로 번역한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이 작품들이 한 사물, 한 텍스트, 한 언어를 그의 기호 체계로 번역한 것이라면, 그 번역의 예술적 효용은 무엇인가? 그의 이번 작업이 단지 자신의 언어를 현실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지 작가 스스로 시험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굳이 프로토타입의 번역에 참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하지만, 그의 일은 기존 텍스트의 단순 번역도, 자신의 기호 체계의 단순 시각화도 아니다.

우선, 그의 언어는 그의 체계 안에서 작동하기에 번역된 텍스트는 그의 체계에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래서 번역을 마친 기호는 이미 이성수라는 작가와 그의 기호 체계 안에서 전유된 기호가 된다. 아예 텍스트가 바뀌었다고 하는 편이 좋다. 그의 이번 작품은 마치 어떤 것도 특정하게 대리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는 기호, 하나의 독자적 사물이 된 기호에 관한 것이다. 한편, 작가는 이번 전시의 표제를 <무한을 위한 표지>로 잡았다. 그의 이번 작업은 그 자신이 만든 기호 텍스트의 단순 번역이 아니라, 지혜를 쫒는 구도자의 마음의 표지다. 이번 전시는 무한을 향한 미적 욕망의 가시화이며, 그가 삶의 반을 천착해 온 문제 그 자체이다. 그의 작품은 한 인간 존재가 다다를 수 있는 절대적 이상으로서 ‘중용’의 상태가 무엇인지, 만약 그 상태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가시화될 수 있을지에 대한 탐구이다. 나아가 인간이 놓인 온갖 조건과 상황에서, 즉 단순하건 복잡하건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삶의 조건 안에서 가능한 ‘상황적 중용’이 무엇인지, 그런 조건적 ‘중용’에서 가능한, 좋은 선택지로서 미, 진리, 사랑, 완전성이 무엇일지에 대한 작가의 물음을 대변한다. 작가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전시된 작품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지시적 기호(indicator, 화살표 모양)는,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하지만, 만약 잘못 쓰일 때 악순환의 자멸, 악, 비진리, 허무의 근원이 된다. 반대로, 중용의 길을 올바로 지시할 때, 무한, 절대, 진리, 선이라는 삶의 대전제로 향하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다. 물론 이번 전시에서 기호는 후자의 상태를 위한 표지이고, 마치 티벳 승려들이 수양을 위해 걸어 두던 만다라 그림 같은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굳이 그의 왕국에 들어서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저 잠시라도 그의 동족이 되어 볼 수는 있다. 그의 동족이 됨으로써 우리가 얻게 될 이득은 이런 것이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고, 우리가 언어를 통해 사유하고 존재하고 바라본다면, 우리는 지금껏 없었던 언어를 통해 세계를 보고 그 안에서 사는 새로운 방식과 지혜를 배우게 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언어는 예술의 핵심적 기능 중 하나를 수행하고 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이 고안한 기호와 언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방식에 대해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이미 그가 확인한 것처럼, 그 방식은 기호 자체의 존재론적 지위, 장르, 매체, 규모, 그리고 수용의 방식에서건 어느 쪽으로건 열려 있다. 그가 다음 전시에서 또 무엇을 고민할 것이며, 어떻게 자신의 기호의 가능성을 확장해 갈지 궁금하다.

 

조 경 진(철학박사, Art Critic)

 

 

이성수 작가의 작업실
지혜의 책
 
세바스찬 #3
무한을 향한
지혜의 책 #1 최초의 점
지혜의 책 #2 단일 상황의 중용
지혜의 책 #5 단일 상황의 중용의 요소화
제목 S
지혜의 책 #7 복합 상황의 중용
지혜의 책 #15 단일 상황의 중용이 복합상황의 중용이 될 때 이상적 중용상황이 된다.
중용 드로잉  연작
세바스찬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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