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지시적(指示的) 수사법(修辭法)으로 부터의 기호

 

 

 

작가 이성수의 작업은 그간 사물이나 풍경 혹은 영화의 소재 속에 등장하는 장면들의 컷이나 하나의 테마를 주제로 설정한 후에 그 모티브를 통하여 이야기를 드러내는 작업을 발현해왔다. 그간 그의 작업은 충분히 설명되는 명징하고도 드라마틱해 보이기까지 하는 묘사와 함께 보는 이들이 굳이 난해 하다거나 개념의 정의로 설명이 필요치 않는 술술 읽는 즐거움 느낄 수 있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작업만으로도 충분히 작가의 의도와 시각적 재미까지 선사함은 물론이었던 그의 작품이 이번 개인전에는 “화살표”라는 다분히 명징하고도 단호한 표식인 기호의 등장으로 그 어법을 조각과 회화 작업으로 풀어내고 있다.

      

기호는 시각화된 약속이다. 문자보다도 훨씬 직설적이며 대중의 머릿속에 어떠한 언어보다도 깊게 각인된 현대사회의 지시(指示) 성의 부호로서 다분한 식별 도구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 왜 작가는 하필 수많은 조형언어를 제치고 화살표를 선택한 것일까? 그리고 그 화살표는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 것일까?

 

 작가는 말한다.“ 나는 건조한 기호에 욕망을 불어넣고, 처절하게 울부짖게 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합의된 최소한의 언어가 성육(成育) 화(Incanation) 되고 오히려 세속화되어 사람의 근본형상과 숭고함이 동시에 보이기를 바란다”. 과연 언어의 성육(成育) 화(Incanation) 란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 것일까? 모태 기독교인 이기도 한 작가는 깊은 신앙심과 함께 그의 성장배경의 모티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정신세계의 정수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기호의 지시(指示) 성은 그러한 신과 인간의 간격, 절대로 넘을 수 없고 태생부터 철저하게 원죄를 쓴 채로 창조자의 믿음과 간곡한 뜻을 수행하는 것, 오로지 그것 만 이 인간의 한계와 미션(여기서는 주어진 말씀의 수행)을 묵묵히 주지하며 따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작가적 본능 에 가까운 조형언어는 깊은 바다의 침전물처럼 수면 위에 떠오르지 않고 잠재의식에 혹은 무의식의 세계에 오랫동안 존재해 있다가 결국에는 회화로 또 조각으로 떠밀려 밖으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잠시 작가가 말하고 있는 성육(成育)화(Incanation)에 주시해 본다.

 

 성육화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으로 태어난 인간의 몸, 즉 현신(現身)을 말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작가가 이러한 직무수행의 의무와 약속의 상징성으로 기호, 즉 화살표 Arrow를 택함으로써 그 심리의 저변에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그간 나름 저항하며 혹은 그 말씀을 수행 하고 따르도록 애쓰며 걸어온 그만의 깊은 갈등과 고뇌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점을 주목해 본다.

 

 인간은 그 누구도 삶과 죽은 그리고 육신과 정신의 고통으로부터 절대로 벋어날 수 없다. 그러한 너무나 자명한 명제 앞에서 간절히 신(神) 또는 창조주를 찾고 의지 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두려움이 작업으로 환원 되는 것은 환경적 태생의 원류와 함께 원죄의 속박에서 잠시 그 짐을 내려놓는 수단의 방편이 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예술이라는 창구를 통해 가능함을 시사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성수의 화살표는 어둡다거나 혹은 공격적 이거나 권위를 찾아 보기는 힘들다. 그 지시(指示)성과 방향은 제 각각을 가리키고 있으나 화살의 색깔들은 형형색색 다채로우며 작가만큼이나 세상을 향해 매일매일 미소와 긍정 의 밝디 밝아 보이는 순수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만이 갖고 있는 남다른 유소년 적 순수함과 영원히 때묻지 않을 것만 같은 호기심 어린 작가적 눈망울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지시하고 있기에 그렇다.

 

 아트스페이스 너트 성진민

 

bottom of page